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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보도사진 200장 1950~19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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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보도사진 200장 일괄

 

 

연대 : 1950~1953년

수량 : 200장

크기 : 18×24cm 내외

 

 

1950년 한국전쟁 발발에서부터 1953년 휴전 직후까지의 모습을 세계 유명 언론사의 종군기자들이 찍은 오리지널 사진 200장이다. 이것들은 전쟁의 현장을 저널리스트의 시각에서 앵글에 담았기 때문에 절박했던 순간들의 생생한 모습을 감동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사진은 당시에 인화된 것들로 사진 뒷면에는 당시 신문 기사가 함께 스크랩되어 있기도 하다. 일부 사진에는 별지 또는 뒷면에 사진설명과 일자, 사진기자를 기록해놓았다. 200장의 사진 중 70장은 액자로 제작되어 있다. 액자 속의 사진 원본의 안전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 사진 크기는 대부분 18×24cm 내외이며 상태는 대부분 좋다.

 

 

 

1. 미군 서울 진주 / 1945. 9. 9.

미군이 서울에 진주하여 중앙청 앞을 행진하고 있다.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남한에는 미군이,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22일 소련군의 평양 진주에 이어 9월 9일에는 미군이 서울에 들어왔다. 미군정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기까지 3년 동안 이루어졌다.

 

 

 

2. 이승만과 맥아더 / 1948. 10. 19.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일본 도쿄의 미군 사령부를 방문하고 맥아더와 함께한 모습이다. 맥아더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을 항복시키고 일본점령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행사에 참석한바 있다.

 

 

 

3. 남한의 시민자위대 / 1948년 경.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죽창으로 무장한 남한 시민들. 1945년 해방 후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은 서로 갈리어, 좌익과 우익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사회는 불안하고 정치는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좌우 이념의 갈등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정점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거리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집회가 그칠 날이 없었다.

 

 

 

4. 6․25는 일어나고 / 1950. 6. 25.

1953년 6월 25일 새벽, 기갑부대로 무장한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략하였다. 이전부터 38선 부근에서의 소규모 충돌이 많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남한 국민들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오전 7시가 넘어서야 라디오 방송은 인민군이 침공해 왔다는 소식만 간단히 전하고 "장병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빨리 원대 복귀하라"는 공지방송만 반복하였다. 6․25가 일어났지만 아직 서울은 평화롭다.

 

 

 

5. 한강철교 폭파 / 1950. 6. 29.

6․25 당시 한강에는 한강인도교(지금의 한강대교)와 한강철교(경인선 복선, 경부선 단선) 3개, 광진교 등 모두 5개의 다리가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고 3일 뒤인 1950년 6월 28일 새벽 1시경 서울 미아리 부근까지 적이 남하하자 아군은 2시 30분, 한강인도교와 철교 3개를 폭파하고 4시에는 광진교를 폭파했다. 그러나 한강인도교만 성공하고, 경인선 상행 철교와 경부선 철교는 일부만 손상시켰을 뿐 실패로 끝났다.

한강인도교의 폭파로 다리를 건너던 수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피난길을 잃은 1백50만 시민과 철수로를 차단당한 4만여 장병들은 엄청난 희생과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폭파도화선에 서둘러 불을 당긴 것은 후방교란을 목적으로 한 불과 2대의 인민군 탱크가 원인이었다.

이 어처구니 없는 결정의 모든 책임은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돌아갔다. 부산에서 열린 군법회의에서 그에 대한 유죄가 선고되었고 1950년 9월 10일 그는 총살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14년 뒤인 1964년 11월 14일 가족들이 재심청구로 무죄를 선고 받고 사후 복권되었다.

한편 당시 한강교 폭파는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 참모부장 김백일 - 공병감 최창식 - 공병학교장 엄홍섭 선에서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여러 증언과 정황진술이 엇갈려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은 과제로 남겨져 있다.

사진은 경부선 철교와 경인선 철교 등 3개의 다리를 미공군 5비행대가 폭파하는 순간의 모습을 항공 촬영한 것이다. 사진 오른쪽으로 끊어진 한강 인도교가 선명하게 보이고, 왼쪽의 3개의 한강철교가 화염에 휩싸여있다. 화염 부근이 노량진이다. 사진 뒷면에는 1950년 7월 8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신문에 기사가 실린 일자이다. 수원 함락으로 미루어볼 때 6월 29일로 추측된다.

 

 

 

6. 수원역의 피난 열차1 / 1950. 6. 30.

6·25가 일어나고 이틀 뒤인 6월 27일 정부는 수도를 서울에서 수원으로 이전하였다. 6월 28일 새벽, 서울이 인민군에 완전히 함락되기도 전에 아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한강 이북의 시민들은 피난길이 막혀 우왕좌왕하였다. 6월 30일 수원 역에서 출발하는 피난열차를 타기위해 피난민들이 기차의 빈 공간을 찾고 있는 모습이다.

 

 

 

7. 수원역의 피난 열차2 / 1950. 6. 30

 

화물칸은 물론 기차 지붕 위에까지 빼곡히 올라탄 피난민들의 모습이다. 피난민들은 서울로부터 32Km 거리의 수원이 언제 적의 손에 들어갈지 몰라, 불안한 마음으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원은 7월 3일 적의 손에 들어갔다.

  

8. 이 한목숨 바쳐 / 1950. 7. 4.

6월 28일 서울을 적에게 내어 주고, 7월 3일에는 수원까지 함락되면서 국군은 수원 이남으로 후퇴하였다. 7월 1일 미군 선발부대가 부산에 입성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전선의 국군도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은 수원 부근에서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어느 국군의 모습이다. 그는 태극기를 총에 걸고 비장한 각오로 전투에 임할 준비가 되어있다.

 

  

9. 스미스부대 부산 도착 / 1950. 7. 1.

6월 30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시설을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에 따라, 7월 1일 일본에 주둔하던 미육군 제24사단 21연대의 선발부대가 한국전 최초로 부산에 상륙했다. 이 부대는 대대장인 찰스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부대(Task Force Smith)라 불렀다. 스미스 부대는 2개 중대 406명의 병사가 수영비행장으로 공수되었다.

7월 5일, 스미스 부대는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북한군의 보·전부대를 맞아 치열한 단독전투를 치렀으나, 북한군의 전차부대를 막지 못하고 약 12시간 동안의 방어전투를 치른 후 안성을 경유하여 천안으로 철수하였다. 죽미령 전투에서 스미스 부대는 밀려오는 북한군 전차들을 파괴할 수 없었다. 북한군과의 첫 전투에서 미군은 충격을 받았고 북한군의 전차가 마치 거대한 전함(戰艦)과 같이 보였다고 말하였다. 미군은 맥아더 원수가 말했듯이 그들이 전선에 나타나면 북한군은 겁을 먹고 모두 도망칠 것이라고 믿었었다. 이 전투로 쌍방간에 많은 피해가 발생하였으며 북한군은 미군의 참전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고 미군은 북한군의 전투능력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사진은 스미스 부대가 부산 시내로 이동하는 모습이다. 전쟁이 일어났지만 부산은 아직 평온하다.

 

  

10. 평온한 인천 / 1950. 7. 6.

 

서울이 적의 손에 들어갔지만 한강인도교가 끊어져 미처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한 대다수의 시민들은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북한군은 수원방면으로 계속 공격을 해나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천 부근에서는 피해가 없었다. 사진은 전쟁 직후의 평온한 인천 모습이다.

 

  

11. 정의의 미군을 환영 한다 / 1950. 7. 11.

부산 경찰서 정문의 유엔군 환영 아치. 아치 배너에는 ‘정의의 미군을 환영 한다’고 쓰여 있고, 왼쪽에는 성조기가 오른쪽에는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6․25가 일어나고 6일 후인 7월 1일에 한국전 최초의 유엔군 선발부대인 스미스부대가 일본으로부터 부산에 도착했다. 이날 인민군은 한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12. 피난을 간다지만 / 1950. 7. 11.


전쟁이 일어난 지 10여일 후의 모습이다. 너도 나도 피난길에 올랐지만 마땅히 갈 곳도 없다. 그저 남쪽으로만 무작정 길을 잡았다. 국군들도 우왕좌왕하기는 마찬가지다. 전선에서는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한 채 후퇴하느라 전열은 흐트러지고 사기는 말이 아니다. 피난민 대열에 뒤섞여 남하하는 국군이 모습도 보인다.

  

13. 탄약통과 두 소년 / Richard Ferguson 촬영. 1950. 7. 22.

미군 공군기지에서 두 소년이 기관총 탄약통을 손질하고 있다. 육이오가 일어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지만, 이들의 손놀림과 표정이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지금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듯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있다.

 

14. 벽보 앞의 시민들 / 1950. 7. 26.

7월 20일 대전 방어선이 무너지고, 미 제24사단장 딘(William F. Dean) 소장이 행방불명되는 등 아군의 전세가 계속 불리하게 돌아갔다. 최전선에 인접한 어느 마을에서 시민들이 벽보에 붙은 최근의 전쟁 뉴스를 걱정스럽게 보고 있다. ‘음성방면 대전과’라는 게시물에는 ‘적 사살 2개 대대 약 1천여 명, 트럭 7대, 쏘제 지프차 20대, 76mm 포 4문, HMG 6문, 소총 700정, 포로 20명’이라고 되어 있다.

   

15. 유엔군 부산 도착 / 1953. 8. 2.

7월 31일 미 제2사단 9연대가 미국 본토로부터 최초로 부산에 도착했다. 8월 2일에는 미 해병 제5여단이 부산에 상륙했다. 사진은 부산 거리를 행진하고 있는 미 해병의 모습이다. 거리에는 미군의 이동만이 눈에 띨 뿐, 아직 부산은 평화 속의 도시다.

    

16. 부산행 피난열차 / Norman Williams 촬영, 1950. 8. 8.

전쟁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전쟁터를 피해 그저 남으로 남으로 향했다. 부산으로 향하는 피난열차가 삼량진역에 정차했다. 기차 지붕 위까지 어린이와 부녀자로 가득하다. 밀려오는 피난민들로 피난열차는 넘쳐나고 벌써 부산은 포화 상태를 이루었다.

   

17. 연자방아는 돌아가고 / 1950. 8. 12.

전쟁이 일어난 지 달포가 지났지만 교외의 농촌 여인들은 한가롭게 연자방아를 돌려 곡식을 찧고 있다. 근처의 언덕과 상공에서는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다.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이와 같이 평화로운 장면들이 점점 죽음과 파괴로 변해갔다.

  

18. “민정”기를 전리품으로 / 1950. 8. 16.

공산군은 개전초기 대전까지 파죽지세의 공격에 힘입어, 7월 21일 낙동강 방어선이 구축되자 김일성은 수안보 전선까지 내려와 8・15 광복절 행사를 기필코 대구에서 하겠다며 집중공세를 폈다. 그 결과 북한군은 낙동강 전투에서 전력이 크게 약화되어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에 힘을 실어주는 꼴이 되었다. 사진은 낙동강 방어선의 국군과 유엔군 병사가 적으로부터 노획한 “민정”기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 낙동강 방어전선의 미해병 용사들 / Stanley Tretick 촬영. 1950. 8. 17.

낙동강 방어전투는 모두 네 차례에 걸쳐 대규모 전투가 이루어졌다. 8월 7일부터 16일 사이의 마산부근 전투와, 8월 7일과 8일의 현풍지역 방어전투, 8월 10일과 11일의 낙동강 돌출부 탈환전투, 8월 31일의 북한군 제9사단의 적정을 파악하는 전투 등이다. 사진은 전투에 투입되는 미 해병용사들의 모습이다.

    

20. 여기는 평화시대 / 1950. 8. 19.

대구로 보이는 거리에서 미군병사가 소년에게 교통 정리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들의 표정에서 전쟁의 그림자는 찾아 볼 수 없다. 여기는 평화시대다.

   

21. 대구 풍경 / 1950. 8. 20.

인근의 낙동강 전선에서는 전투가 한창이다. 쌀가마를 잔뜩 실은 우마차가 대구 시내를 활보하고 있다.

   

22. 낙동강을 뒤로하고 / Norman Williams 촬영. 1950. 8. 20.

낙동강 방어선 부근의 주민들이 기차를 타고 전투지역을 벗어나고 있다. 8월 4일부터 벌어진 전투는 9월 중순까지 계속 되었다. 지붕도 없는 화물열차에 발 디딜 틈이 없다.

   

23. 탄약 운반하는 주민들 / Norman Williams 촬영. 1950. 8. 21.

낙동강 전선에 노역자로 동원된 주민들이 탄약을 운반하고 있다. 이들은 비무장을 한 채 등짐으로 탄약과 무기 등을 운반하고 있다.

    

24. 미사를 드리는 유엔군 1 / Tom Carson 촬영. 1950. 8. 12.

생사를 보장할 수 없는 죽음의 현장인 전쟁터에서 사람들은 모두가 경건해지게 마련인가? 야전에서의 미사는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곳이면 바로 그 곳이 예배당이고 신전이다. 사진은 낙동강전투에 참여중인 미군 제5해병대 병사들이 야전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다.

   

25. 미사를 드리는 유엔군 2 / Richard Jr Ferguson 촬영, 1950. 8. 25.

미군의 패톤(Patton) 탱크를 배경으로, 가톨릭 군종신부인 프루델(Harold O. Prudell)이 미사를 드리고 있다. 이곳은 대구 북쪽, 바닥을 드러낸 마른 강에 위치한 방어 진지다.

 

26. 어느 인도인의 장례 / Ed Hoffman 촬영. 1950. 8. 16.

유엔위원회 소속인 인도인 나야르(Col unni Nayar)의 화장을 미군과 국군이 지켜보고 있다. 그의 유해는 장작더미 위에 올려 져 인도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는 한국의 자유를 위해 헌신하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한줌의 재로 생을 마감하였다. 나야르는 지프를 타고 가던 중 지뢰를 밟아 차가 폭발하면서 사망했다.

 

 27. 어느 해 여름날 풍경 / 1950. 8. 22.

부모 잃은 아이가 길에 홀로 남겨져 있다. 한여름의 뙤약볕에서 땀과 눈물과 먼지로 온몸이 뒤범벅이 되어 있다. 아이의 옆에는 밥그릇과 숟가락이 놓여 있다. 아이는 너무 어려 아직 제 몸 하나 가누지도 못한다. 혼자의 힘으로 이 난관을 헤쳐 나갈 수는 없다. 난리 통이라 누가 데려다 돌보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 해 여름날 풍경은 우리의 마음을 저리게 한다.

  

28. 부산 입성한 유엔군 / 1950. 8. 29.

한국전에 투입되는 유엔군이 계속 부산으로 들어오고 있다. 이제 막 부산에 도착한 미 해병대원들이 부산시가지를 트럭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들은 곧 전선으로 투입될 것이다.

   

29. 담배 파는 소년 / Tom Carson 촬영. 1950. 8. 31.

부산 피난지에서 형제로 보이는 소년들이 미국산 담배와 껌, 사탕 등을 좌판에 놓고 팔고 있다. 대다수의 피난민 소년들은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될 만한 일을 찾고 있지만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좌판이야 말로 이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거리 중 하나다. 그렇다고 수입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30. 신체검사 받는 장병들 / 1950. 9. 1.

6․25가 일어난 지 이제 두 달이 지났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고 이제 그 자리는 또 다른 젊은이들로 채워질 것이다. 이들은 짧은 훈련을 마치고 곧바로 전방으로 배치될 것이다.

   

31. 내 이름은 리틀 조 / Ed Hoffman 촬영. 1950. 9. 4.

전쟁고아 중에서 운이 좋은 아이는 유엔군 병사가 양자로 삼아 돌보아 주기도 하였다. ‘리틀 조’라 불리는 전쟁고아가 마산 근처에서 미군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아이는 자신의 별명이 붙여진 헬멧을 쓰고, 미군 병사 버스키(Alfred A. Busky)와 미군 준위 프레처(Emery Pretzer)의 보호를 받고 있다.

  

32. 대전과 부산의 갈림길 / Stanley Tretick 촬영. 1950. 9. 7.

대구 시가지의 교차로에서 헌병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이곳은 대전과 부산의 갈림길이다. 이 교차로는 얼마 후 진격하는 인민군을 막기 위해 전쟁터가 될지도 모른다. 인민군이 대구 근접 10Km까지 진격해 오면, 모래주머니로 만들어진 간이호가 이곳 교차로에 준비되어 방어에 들어갈 것이다. 전운이 감도는 여름날 오후다.

 

33. 월미도에서 생긴 일 / Ed Hoffman 촬영. 1950. 9. 15.

1950년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은 적의 허를 찌른 모험이었다. 미 해병 제5연대의 선발대가 이날 새벽 월미도에 상륙함으로써 작전은 개시되었다. 월미도의 인민군 저항은 예상보다 격렬하지 않았다. 작전 개시와 함께 이루어진 함포와 공군기의 격렬한 포격과 폭격으로 월미도의 방어병력은 거의 혼이 빠진 상태였다. 미 해병은 공격 개시 30분 만에 월미도 고지를 장악하여 작전 성공의 기틀을 마련했다. 사진은 유엔군이 월미도에서 생포한 인민군 포로들이다. 벌거벗긴 채로 손을 들고 있다.

   

34. 시름과 슬픔 속에서 / 1950. 9. 21.

신원을 알 수없는 미군 포로 두 명이 평양 근처의 포로수용소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들의 모습에서 깊은 시름과 슬픔을 읽을 수 있다. 1950년 말 현재 유엔군 포로는 최소 5-6만 명이 발생했다. 그러나 정전협상에서 인민군은 1만 1천명의 명단을 제출해 왔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의도가 있겠지만 그만큼 생사를 보장할 수가 없는 것이 포로의 운명이다. 사진은 전쟁 이후 유엔군이 중공군을 통해 받은 첫 번째 사진 중의 하나다. 그 후 이들의 생사는 알 길이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들은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치욕을 견뎌야만 한다는 것이다.

  

35. 화려한 외출 / Stanley Tretick 촬영. 1950. 9. 23.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9월 19일부터 미 해병사단이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서울 방향으로 전진하였다. 9월 20일 새벽, 미 해병 제5연대는 행주 나루에서 한강 도하 작전을 실시하였다. 사진은 유엔군이 김포 부근에서 인민군 포로들을 속옷차림으로 이송하고 있다.

 

  

36. 부드러운 미소로 / 1950. 9. 24.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미군 병사 바론(Philip A. Barone)이 자신의 시레이션(통조림 야전식)을 아이에게 먹이고 있다. 미군은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에 성공했다. 부드러운 미소를 이대로 유지하면서 아이와 친해지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그는 아이 덕분에 오랜만에 행복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왼쪽 위로 야전 침대에 누워있는 부상당한 병사의 얼굴이 보인다.

 

  

37. 한숨을 길어 올리고 / Richard C. Ferguson 촬영. 1950. 9. 24.

인민군의 인천 침공 때 인근 언덕으로 피신했던 주민들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후 집으로 돌아왔다. 두 여인이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다. 왼쪽 여인의 남편은 인민군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민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지금 이 여인은 한숨을 길어 올리고 있다. 전쟁이 만들어 낸 풍경이다.

 

38. 식량 배급은 / 1950. 9. 24.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천은 평온을 되찾고 시민들에게 식량 배급이 주어졌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주민들은 식량난에 빠지게 되었다. 인천도 서울 경기지역에서 많은 피난민들이 몰려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처럼 혼란한 시기에 주민에게 공정한 식량 배급을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미 해병 커리니(Raymond J. Kearney)가 원만한 식량배급을 위해 질서를 유지하고 시민들을 보호하고 있다.

   

39. 동원된 노역자 / 1950. 9. 28.

유엔군의 활주로 건설 공사에 동원된 남한 시민들이다. 별다른 장비도 없이 삽과 곡괭이와 지게가 전부이다. 이처럼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서는 주민들이 노역에 동원되곤 했다. 그러나 전황이 바뀌고 북한군이 점령하면 노역에 동원되었던 주민들에겐 참혹한 대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개 학살로 이루어 졌다.

    

40. 서울 길목에서 / Richard C. Ferguson 촬영. 1950. 9. 30.

서울 탈환작전에 참여한 미 해병이 아이에게 자신의 시레이션(통조림 야전식) 하나를 건네주고 있다. 아이는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엄마 등에 업혀 아무런 표정이 없다. 미군의 눈에 비친 서울은 참혹함과 안쓰러움이 전부다. 폐허 속에 헐벗고 굶주린 주민들의 눈빛엔 전쟁의 그림자가 어둡게 드리워져 있다.

  

 41. 조치원을 지나면서 1 / Ed Hoffman 촬영. 1950. 9. 30.

1950년 9월 28일 서울수복 하는 날, 미 제24사단은 대전을 탈환했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38선 진격명령을 내리고 후방 부대도 계속 북진하였다. 사진은 대전을 함락시킨 유엔군이 조치원을 지나자 주민들이 열렬히 환영하고 있다.

   

42. 조치원을 지나면서 2 / Ed Hoffman 촬영. 1950. 9. 30.

국군이 주민들과 함께 어깨춤을 추고 있다.

 

  

43. 폐허 속에서 / Stanley Tretick 촬영. 1950. 10. 2.

9・28 서울수복 후 피난에서 돌아온 서울시민들이 건질만한 물건이 있는지 자신들의 집터를 살펴보고 있다. 전쟁 중 가옥 피해가 60여만 호에 이르고, 이들은 폐허가 된 집터 위에서 또 한 번 절망감을 느껴야 했다.

 

44. 누가 이들을 심판하랴 / 1950. 10. 3.

서울수복 후 국군이 인민군에게 협조한 적색분자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심문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공산당의 앞잡이로 나서 선량한 시민을 학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른 사람도 있겠지만, 전쟁 중에 이러한 사실을 일일이 밝힌다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상적 대립에 대한 보복은 결국 무고한 시민들에게 돌아간다. 이러한 사실은 남한이라고 자유스러울 수는 없다.

  

45. 폐허 속 아이 / 1950. 10. 6.

서울수복 후 폐허로 변한 집터 위에서 아이가 울고 있다.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세간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모두 부서졌다. 아이는 살던 집터를 찾아왔다. 폐허 속에서 두려움을 느낀 것일까.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46. 태극기를 흔들며 / 1950. 10. 11.

개성에 입성하는 미 제1기병사단을 환영하는 개성 시민들이다. 1950년 10월 6일 국군 제2군단은 중부전선에서 북진을 개시 하였고, 10월 8일 미 제1기병사단은 서부전선에서 38선을 돌파하고, 10월 11일에는 개성에 들어섰다. 전쟁 전 38선 이남에 위치했던 개성 시민들은 북진하는 유엔군을 열렬히 환영했다. 이들은 전선이 바뀔 때마다 인공기와 태극기를 번갈아 가며 흔들어대야 했다.

  

47~48. 공포의 언덕에서 1~2 / 1950. 10. 18.


 

1950년 10월 17일 국군 제1군단 은 함흥과 흥남을 탈환하였다. 사진은 함흥지역의 민간인이 인민군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당한 현장의 모습이다. 계단식으로 된 언덕은 완전히 시신으로 덮여있다. 가족과 친지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살펴보고 있다. 이 무시무시한 장면은 미군 통신대의 사진가가 찍었다.

 

49. 원산 함락 / Richard Ferguson 촬영. 1950. 10. 19.

원산이 함락되고 시내 중심가 건물에 걸려 있던 김일성 대형 초상화가 미군병사에 의해 내려지고 있다.

  

50. 우물 속의 비극 / 1950. 10. 19.

인민군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당한 함흥 주민의 시신을 국군의 지휘아래 인민군 포로들이 우물 속에서 끌어내고 있다. 우물 속에서는 모두 65구의 시신이 발굴되었다. 인민군은 퇴각하면서 무고한 주민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거기에는 남녀노소의 구분도 없었다. 살해 방법도 너무 잔인하여 일일이 밝힐 수가 없을 정도다.

  

51. 악마의 화신인가 / 1950. 10. 19.

1950년 10월 17일 국군의 함흥 탈환에 이어 10월 19일 유엔군은 평양을 탈환하였다. 한 흑인 병사가 김일성 대형 초상화를 전리품으로 챙겨 들고 있다. 김일성은 북한 공산주의 혁명의 주역으로 한국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러나 초상화 속에는 김일성은 없었다. 악마의 화신만이 들어 앉아있었다.

 

 

52. 평양의 코메디 / 1950. 10. 23.

미군 포로와 일본계 한국인 포로들이 평양 시내를 행진하고 있다. 북한군이 평양주민의 사상적 통제를 위해 이들을 내세운 것이다.

 

  

53. 맥아더 장군 만세 / Ed Hoffman  촬영. 1950. 10. 25.

평양의 한 가족이 유엔군의 평양 입성을 환영하는 벽보 앞에 서있다. 벽보에는 ‘맥아더 장군 만세’라고 영어로 씌어있다. 맥아더는 UN군 최고사령관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고 지금 평양을 탈환하고 계속 북진 중이다. 그러나 평양 시민들은 벽보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고 있다. 이 벽보는 평양시민이 미군을 환영하는 벽보다.

    

54. 평양 스탈린 거리 인민군 포로 행진 / Ed Hoffman  촬영. 1950. 10. 26.

평양은 그동안 북한의 수도로서 그 면모와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평양의 중심가에는 ‘스탈린 거리’가 있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인 스탈린을 기리기 위해 김일성이 직접 이름을 지었다. 사진은 국군이 평양 탈환 후 평양의 ‘스탈린 거리’에서 인민군 포로들을 이동시키고 있는 모습이다.

    

55. 대동강 철교를 넘어서 / Ed Hoffman 촬영. 1950. 10. 27.

미 제1기병사단이 평양 대동강 철교를 건너고 있다. 경의선의 평양역과 대동강역 사이에 있는 철교다. 지금 유엔군은 이 다리를 건너 북진하고 있지만 압록강까지 북진했던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면서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56. 죽음의 위험보다는 식량이 / Ed Hoffman 촬영. 1950. 10. 29.

북한 황주의 한 여인이 무거운 밀가루 포대를 머리에 이고 운반하고 있다. 그녀는 최전방의 혼란 속에서 식량을 약탈당할까 우려하여 서두르고 있다. 굶주림의 고통에 처해있는 주민들은 약탈로 인한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식량을 운반하고 있다. 전쟁은 인간의 도덕성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다. 전쟁의 극한 상황에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어떠한 행위도 합리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인간성의 상실이야말로 전쟁이 주는 비극이다.

   

57. 청천강의 미국 기자 / 1950. 10. 30.

미국 BBC TV의 Cyril H. Page 기자가 청천강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누어 주고 있다. 유엔군은 만주 국경까지 진격하고 있다.

    

58. 통곡하는 여인들 / 1950. 10. 31.

평양 주민들이 인민군에 의해 무차별 죽음을 당한 현장이다. 며느리와 시어머니로 보이는 두 여인이 남편과 아들의 시신 앞에서 통곡하고 있다. 인민군은 유엔군의 평양 공격이 거세지자 후퇴하기에 앞서 무고한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이러한 비극은 비록 평양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59. 눈망울도 또렷한데 / 1950. 11. 13.

전쟁의 중심에는 늘 어린아이들이 남겨지게 마련이다. 이들이야 말로 전쟁의 불쌍한 희생양이다. 그들은 전쟁의 갈등에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았지만 고통을 받아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특히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들은 전쟁이 남긴 비극 중의 비극이다. 사진은 서울 거리를 방황하던 아이들을 보호시설로 보내기 위해 트럭에 실은 모습이다. 아이는 불안한 중에서도 눈망울이 또렷하다.

    

60. 평양 시민들 / 1950. 11. 14.

1950년 10월 19일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탈환하고, 10월 27일에는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탈환 시민환영대회’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그 후 북진을 계속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11월 4일 중공군의 참전으로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면서 후퇴를 하게 된다. 사진은 11월 10일 경 평양의 모습으로, 이때까지만 해도 평양 시민들은 피난을 가지 않고 전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후 12월 5일 평양은 중공군의 손에 떨어지고 말았다.

  

61. 이게 웬 쌀이냐 / Ed Hoffman 촬영. 1950. 11. 14.

북한의 어린 세 남매가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길에 흘린 곡식을 자루에 주워 담고 있다. 안 그래도 집에 식량이 떨어져 걱정하던 참인데 남매는 마냥 신기할 뿐이다. 며칠간의 양식을 얻은 이들의 얼굴엔 넉넉함이 보인다. 인민군은 미 제24사단에 의해 후퇴했다.

   

62. 따발총과 소년 / 1950. 11. 4.

군복에 철모까지 쓰고 따발총을 어깨에 멘 아이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다. 따발총은 중공군과 인민군이 사용한 소련식 기관단총으로 일명 ‘파파샤’로 불린다. 엄청난 연사속도로 나는 소리 때문에 남한에서는 ‘따발총’이라 했고, 북한에서는 ‘뚜르레기’라고 불렀다. ‘뚜르레기’는 ‘똬리’의 함경도 사투리로 이 총에 사용되는 드럼탄창이 ‘똬리’모양을 닮은 데서 연유한 말이다.

 

63. 압록강까지 앞으로 / Ed. Hoffman 촬영. 1950. 11. 15.

1950년 10월 19일 평양 수복 후 맥아더 사령부는 압록강을 향한 대대적인 포위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 작전의 주공을 미 제1해병사단이 맡았다. 이들은 10월 26일 장진호 방면 진출을 위해 원산으로 상륙했다. 이때 맥아더 사령부는 유엔군의 전진 한계선과 작전 통제선인 맥아더 라인(정주~함흥)을 철폐하고 뉴맥아더라인(선천~성진)을 재설정하였다. 11월에는 소위 북진통일의 마지막 관문인 중소 국경을 목표로 한 크리스마스 공세를 감행하였다. 사진은 압록강까지 진격한 미 해병부대.

 

64. 하갈우리에서 Irwin Tress 촬영. 1950. 11. 19.

1950년 11월, 미 제1해병사단 병력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중공군 제7병단(7개사단 병력, 12만명 규모)에  포위되었다가 12월 흥남으로 철수하기까지 처절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장진호 전투로 알려진 이 전투는 미군 전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 후퇴작전을 통해서 미 제1해병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중공군 7개 사단에 궤멸적 타격을 입혀 그들의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 작전이 1․4 후퇴작전의 시작이었다. 사진은 얼어붙은 계곡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미 해병대원.

 

65. 압록강 물에 발 담그고 / Ed. Hoffman 촬영. 1950. 11. 20.

고토리는 하갈우리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이곳 역시 장진호 전투의 중심지다. 낮에는 영하 20도, 밤에는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살인적인 추위 속에서, 미 해병은 700여명의 전사자와 200여명의 실종자, 3,500여명의 부상자를 냈다. 그밖에 6,200여 명의 비전투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반해 중공군은 25,000명의 전사자와 12,000명의 부상자를 낸 세계 전사상 가장 극한상황에서의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미 제24해병연대 병사가 강가에서 발을 씻고 있다. 

 

66. 고토리 노인과 빵 한 조각 / 1950. 11. 21.

장진호 부근의 작은 마을 고토리의 한 노인이 미 해병에게서 얻은 한 조각의 빵으로 한 끼를 때우고 있다. 생명을 담보로 지금 전투가 한창인 미군에게 모든 여건은 최악의 상황이다.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은 곧 자신의 생명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군이 노인에게 건네준 것은 그저 빵 한 조각이 아니다. 그것은 고귀한 사랑이다.

  

67. 고토리에서 만난 아이 / 1950. 11. 21.

1950년 11월 20일 경, 고토리에서 하갈우리로 이어지는 도로에는 중공군이 방어선을 치고 있었다. 하갈우리에는 미 해병이 고립되어 있다. 하갈우리는 교통의 중심지로 유엔군은 이곳을 벗어나야만 함흥으로의 길이 열린다. 이제 곧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질 판이다. 아직 11월이지만 이곳의 기온은 영하 20~30도를 오르내린다. 고토리 마을의 어린 남매가 추위를 피해 양지에서 웅크리고 있다. 이들의 옷은 이곳의 겨울을 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신발 역시 형편없이 초라하다. 이들은 이 산골에서 왜 전쟁을 하는지 알 턱이 없다.

  

68. 장독은 어디다 쓰려고 / 1950. 11. 22.

1950년 10월 10일, 국군 제1군단이 원산을 탈환하고 10월 26일에는 미 제10군단이 원산에 상륙하여 장진호 일대로 진출 하면서 원산 시민들은 통일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의 불리함이 전해지면서 원산 주민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중년의 여인이 커다란 장독을 머리에 이고 황급히 길을 가고 있는 모습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난리 통에도 여인은 살림살이가 걱정이다. 여인의 표정과 거리의 모습에서 전장의 긴박함이 느껴진다. 11월 28일 유엔군 사령부는 긴급작전회의를 열고 평양, 함흥, 원산 철수를 결정하게 되는데, 이 사진은 이러한 결정이 내리기 며칠 전의 원산 풍경이다.

  

69. 스탈린과 김일성의 말로 / 1950. 11. 29.

유엔군 병사가 스탈린과 김일성 사진을 전리품으로 챙기고 있다.

 

70. 돈을 세는 노인 / Walter Lea 촬영. 1950. 11. 30.

북한 안주의 장터에서 한 노인이 한가롭게 돈을 세고 있다. 노인은 지금 전쟁이 한참이라는 사실도 잠시 잊은듯하다.

   

71. 공산당의 ‘자유’를 버리고 / Ed Hoffman 촬영. 1950. 12. 4.

북한 주민들은 망치와 낫이 그려진 붉은 깃발이 걸린 평양에 남아서 피난의 고통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피난 보따리를 짊어지고 얼음이 둥둥 떠내려가는 대동강을 건너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들은 유엔군이 평양을 수복하기 이전에 ‘공산당의 축복’을 경험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차라리 집과 재산을 포기하고 피난생활에서 오는 고통을 겪는 것이 오히려 공산당의 ‘자유’보다 낫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72. 대동강을 건너서 / Fred Waters 촬영. 1950. 12. 4.

피난민 노파와 어린 소녀가 이제 막 대동강을 건넌 후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마치 칼로 살을 베는듯하기도 하고, 다리가 붙어 있는지 떨어졌는지 감각이 없다. 생전 처음 당해보는 고통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펼쳐질 피난길의 여정은 이보다 훨씬 더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이러한 사실을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73. 갈 길은 멀지만 / 1950. 12. 4.

북한 주민들이 중공군의 진격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 가던 중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어제 오늘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이다. 그래서 자꾸만 고향 쪽으로 고개가 돌아가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들은 배천, 영변, 안주, 신안주, 평양 등지에서 오는 피난민들이다. 이 도시들은 인민군의 작전권에 들어있는 도시들이다. 북쪽 전선에서는 장진호를 중심으로 유엔군의 후퇴작전이 한창 진행 중이다. 말이 후퇴작전이지 끊임없는 공격의 연속이다. 이 들의 주임무는 후방의 병력과 피난민들이 안전하게 남하할 수 있도록 적의 남침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것이다. 지금 이렇게나마 피난을 갈 수 있는 것은 전선을 지켜주는 국군과 유엔군의 고귀한 생명의 대가인 것이다.

   

74. 평양에서 후퇴하는 국군 / Ed Hoffman 촬영. 1950. 12. 4.

유엔군은 1950년 10월 2일부터 평양에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영국 제14보병연대의 엄호 아래 한국군이 임시로 만들어진 다리를 통해 줄을 지어 대동강을 건너고 있다. 이들이 무사히 강을 건넌 후 다리는 유엔군에 의해 폭파되었다. 평양은 12월 5일 중공군에게 완전히 함락되었다.

   

75. 흥남철수 준비 / 1950.12.10.

유엔군은 흥남철수작전에 앞서 흥남부두에 군수물자를 집결시키고 있다. 철수작전은 12만 대군에 걸맞는 군수물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부상병의 후송 문제 등이 따랐다.

   

76. 치고 빠져라 / 1950. 12. 15.

장진호부근의 하갈우리에서 방어선을 치고 있는 미 해병대의 모습이다. 작전명은 ‘치고 빠져라’다. 혹한 속에서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중공군의 포위 부대를 공격하여 돌파구를 개척해 함흥까지 이동하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전투부대와 모든 장비, 부상군인들을 안전하게 철수시킴으로써 흥남철수작전의 성공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는 세계 전사상 가장 극적이고 훌륭한 업적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77~79. 눈물의 흥남부두1~3 / 1950. 12. 23.


 


 

흥남철수 계획이 알려지자 수십만의 북한 피난민들이 흥남부두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던 주민들로, 유엔군이 후퇴하게 되자 공산당의 보복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때 약 10만 명의 피난민이 남으로 내려왔다.

 

80. 흥남철수와 유엔군1 / 1950. 12. 24.

북동부 전선에서 후퇴한 유엔군이 흥남 항에서 LST 함의 승선을 기다리고 있다. 해군중장 조이(Charles T. Joy)에 따르면, 이는 모든 군대와 물자들이 해상을 통해서 철수되는 첫 역사적 사건이라고 말했다.

 

81. 흥남철수와 유엔군2 / 1950. 12. 24.

1134호에 승선하는 유엔군.

 

82. 흥남철수와 유엔군 3 / 1950. 12. 24.

유엔군과 피난민의 성공적인 철수 임무를 수행한 병사들이 마지막 철수를 준비 하고 있다.

 

83. 흥남철수와 유엔군4 / 1950. 12. 24.

흥남철수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병사들이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84. 불타는 흥남항 / 1950. 12. 24.

유엔군은 흥남철수작전을 성공리에 마친 후 흥남항을 폭파하였다. 흥남철수작전이 완료된 이후에도 흥남부두에는 배를 타려는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마지막 수송선이 부두를 떠날 때 육지에 남은 피란민들은 울부짖으며 떠나는 배를 향해 몸부림쳤고 일부는 바다에 몸을 던지기도 했다. 이때 약 10만 명의 피난민이 남으로 이송되었고 거의 같은 수의 피난민이 선박 부족으로 그대로 남겨졌다.

 

85. 흥남철수1 / 1950.12.24.

환자수송.

 

86. 흥남철수2 / 1950. 12. 24.

흥남 철수작전 마지막 임무로 유엔군 병사가 탄약과 무기 등 군수물자를 불사르고 있다.

 

87. 고아 수송 / 1950. 12. 27.

지난 11월, 유엔군은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자 거리를 헤매는 전쟁고아를 제주도에 집단 수용키로 했다. 고아들을 위해 마련한 수송기다.

 

88. 한강을 건너고 / 1950. 12. 29.

6・25 직후 한강을 건너지 못해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했던 시민들은 공산정권의 고통 속에서 3개여 월을 보내야만 했다. 이때 서울 시민들은 공산당의 횡포와 만행을 똑똑히 보고 경험하였다. 유엔군이 다시 후퇴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서울 시민들은 한강만은 건너야 한다는 생각들을 갖고 있었다. 실지로 많은 서울 시민들과 이북 피난민들이 1・4후퇴 직전에 한강을 건넜다. 사진은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넌 피난민들 모습이다. 이곳은 수심이 깊은 곳으로 아직 얼음이 얼지 않았다.

   

89. 피난 짐인지 이사 짐인지 / 1950. 12. 30.

피난 짐은 대개 간소하게 마련이다. 간단한 취사도구와 약간의 옷가지면 충분하다. 사진 속의 피난민은 마치 이사를 가는 듯하다.

  

90. 군화 소리 요란하지만 / Ed Hoffman 촬영. 1951. 1. 1.

두 고아가 부산 역 근처에서 전방으로 출동하는 유엔군의 이동통로 한 복판에서 웅크린 체 자고 있다. 장비 소리와 군화 소리가 요란하지만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그간의 피난생활이 이들을 이처럼 태연하게 만들었다. 이런 모습이 점차 일반화되어 가면서 피난생활의 시름도 깊어만 갔다. 

   

91. 1・4후퇴와 한강 / Fred Waters 촬영. 1951.1.4.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고 있는 피난민 가족. 뒤로는 부서진 한강 다리가 보인다. 수십만 명의 피난민이 중공군의 진격이 다다르기 전에 서울을 빠져나가려고 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 여름 공산당 치하에서의 악몽을 떠올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92. 어디까지 가야 하나 / 1951. 1. 5.

1・4후퇴 때 한강을 넘은 피난민 중에는 대전 이남까지 남하한 사람들도 있으나, 유엔군의 평택방어선에서 길이 막힌 사람들은 평택 부근에서 피난생활을 해야만 했다. 주로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피난길은 이어졌다. 사진은 과천부근의 피난민들로 이들은 오늘 중으로 수원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이들이 수원을 빠져나갈 때쯤이면 북한군이 수원을 점령할 것이다. 수원은 1월 7일 적의 손에 들어갔다.

   

93. 인천 배다리 / 1951. 1. 5.

1・4후퇴 소식이 전해지자 인천시민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이 배다리로 몰려와 피난을 떠나려고 한다. 배다리는 송현동 갯골 수로를 통해 배가 드나들었다. 커다란 배의 갑판에는 피난민들로 북적거린다. 이들은 배를 타고 다른 항구로 가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인근의 대다수의 주민들은 수원을 통해 남쪽으로 걸어서 피난길에 올랐다.

   

94. 차라리 꿈이기를 / 1951. 1. 9.

원산 전투에서 지프차를 타고 후퇴하던 네 명의 미군이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는 장면이다.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이들의 운명은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

   

95. 고아를 돌보는 수녀 / 1951. 1. 12.

인천의 ‘세인트 폴’(?) 고아원에서 아이들이 미사를 보고 있다. 미국 함선 ‘엘도라도 호’에서 온 해군 성가대가 성가를 불렀다. 이 고아원은 폭격으로 건물 일부가 부서졌다. 그래도 아이들의 모습에서 평온함이 느껴진다. 이들을 돌보는 수녀도 보인다.

   

96. 망가진 자전거 / Bert Ashworth 촬영. 1951. 1. 12.

지금 막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피난 온 남자가 망가진 자전거를 들고 가고 있다. 자전거는 앞바퀴가 찌그러졌다. 남자는 자전거를 고쳐서 사용할 생각이 분명하다. 자전거는 피난 생활에서 귀중한 이동수단이 된다. 남자의 짐으로 보아 자전거는 그의 재산목록 1호가 분명하다.

   

97. 어디로 가는 길인가 / 1951. 1. 13.

기찻길은 남으로 뻗어있고 길을 따라 끝도 없이 이어지는 피난민 행렬. 이들은 목적지도 없이 그저 앞 사람 꽁무니만 보고 무작정 남쪽으로 가고 있다. 며칠 전 내린 눈으로 길은 빙판이지만 바로 뒤에서 중공군이 쫓아오니 쉴 겨를이 없다.

 

98. 엄마는 어디에 / 1951. 1. 15.

대구 근처 피난민 수용소의 어린 고아가 추위를 피해 양지에서 볕을 쬐고 있다. 아이는 현재 수백 명의 어린이와 함께 수용소에서 보호를 받고 있다. 말이 수용소지 영하의 날씨에 행색이 말이 아니다. 보살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모두 제 살길이 바쁜 처지다.

   

99~101. 슬픈 얼굴들1, 2, 3 / 1951. 1. 16.


 


 

전쟁 중의 어린이의 얼굴에는 단지 공포와 피곤함이 보일 뿐이다. 이런 아이들은 어디서든 볼 수 있다. 사진은 대구역에서 만난 세 아이의 모습이다. 왼쪽의 아이는 나름 괜찮은 채비를 하고 부모를 따라 이제 막 남으로 피난을 왔다. 그러나 그간의 여정으로 피난 생활에 왠지 불안해 보이는 표정이다. 가운데는 누이처럼 앳돼 보이는 엄마가 아이를 업고 있다. 오른쪽의 누더기를 걸친 아이는 왼쪽의 잘 차려 입은 아이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부모를 잃고, 잔뜩 겁에 질려 있는 표정이다. 이들 세 아이는 공통적으로 모두 슬픈 표정을 갖고 있다.

 

102. 초라한 좌판이지만 / 1951. 1. 18.

 

1・4후퇴로 대구에 내려온 피난민들은 당장 생계를 꾸리는 것이 문제였다. 아이들도 무슨 일이라도 하여 생활에 보탬을 주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이들은 미국산 담배와 껌, 초콜릿 등 미군부대에서 나온 물건들을 좌판에 놓고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103. 전쟁 때문이다 / 1951. 1. 23.

원주부근 피난길에 부모에 의해 버려진 아이다. 사랑하는 자식을 광주리에 앉혀 놓고 약간의 먹을 것을 손에 쥐어 주고 부모는 그렇게 떠났다. 피난 중에 말 못할 절박한 사정이 있었나 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태연하게 과자를 먹으면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 전쟁 때문이다.

 

104. 죽은 말은 말이 없고 / Ed Hoffman 촬영. 1951. 1. 26.


한 남자가 길가의 죽은 말을 낫으로 자르고 있다. 이 말은 며칠 전에 죽어 얼어있는 상태로 길가에 버려져있다. 한겨울이라 자연냉동이 되었다. 남자는 식량난에 처해 있던 중 행운을 잡은 것이다.

 

105. 새벽안개 속으로 / Ed Hoffman 촬영. 1951. 1. 30.

노인들이 새벽안개 속에서 걸어가고 있다. 늙은이라고 피난길에 예외일수는 없다. 노인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짐 꾸러미를 짊어지고 진흙투성이 길을 따라 피난을 가고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지팡이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공산당 앞에서는 늙은이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노인들은 잘 알고 있나 보다.

 

106. 엄마를 불러 봐도 / Ed Hoffman 촬영. 1951. 2. 2.

피난길에 부모 잃은 아이가 배고픔과 추위의 고통 속에서 울부짖고 있다. 지금 아이는 응석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는 너무 어려 자신이 처한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지금 무언가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다. 이제 조금 후면, 아이는 아무리 울어도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107. 쓰레기 더미에서 / Bert Ashworth 촬영. 1951. 2. 4.

중년의 남자와 그의 아이들이 미군의 통조림통 쓰레기더미에서 먹을 것을 찾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굶주림 앞에서 인간의 존엄은 어떤 모습을 보일까. 이 사진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단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모든 행동은 정신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전쟁은 이처럼 사람의 정신세계를 황폐하게 만든다. 

 

108. 부산 피난살이 / Richard C. Ferguson. 1951. 2. 6.

부산으로 피난 온 중년의 두 여인이 길가에 좌판을 차려놓고 초콜릿과 껌 등을 팔고 있다. 차림으로 보아 부유한 집안의 아낙네로 보인다. 피난생활이 이들을 거리로 내 몰았다. 행상은 금지되어 있고, 이를 어기면 감옥에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런 장사 외에는 돈을 벌 방법을 모른다.

 

109.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 1951.2.8.

유엔군 병사가 피난길에 부상당한 부녀자를 돌봐 주고 있다. 여인은 머리와 발을 다친듯하다. 인적이 없는 피난길에 홀로 남겨졌을까? 주위에는 사람도 없다. 미군 병사가 자신의 발을 치료하고 있는데 여인은 허공만 응시하고 있다.

 

110. 어디까지 가야 하나 / Bert Ashworth 촬영. 1951. 2. 10.

집과 부모를 잃은 어린 세 남매가 무작정 남쪽으로 가고 있다. 소녀는 동생을 앞세우고, 머리에는 이불을 이고 등에는 어린 남동생을 들쳐 업었다. 소녀의 손에는 미군에게서 얻은 초콜릿이 쥐어져 있다. 이들은 유엔군이 마련한 피난처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111. 꿈도 희망도 없지만 / Richard Fercuson 촬영. 1951. 2. 11.

전쟁 중에 가족과 재산을 모두 잃은 노인이 미군 시 레이션(야전용 통조림) 박스로 만든 그의 새로운 ‘굴’ 집 앞에 앉아 있다. 전쟁이 일어난 후 지금까지 7개월여 사이에 노인은 평생 경험했던 것보다도 훨씬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이제 노인에게는 꿈도 희망도 없다. 가족이 없으니 어디 마음 붙일 곳도 없다. 그저 전쟁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112. 목계나루 근처 / Ed Hoffman 촬영. 1951. 2. 13.

충주 북쪽 목계 근처의 한강 둑을 따라 눈길을 걷고 있는 피난민. 이들은 유엔군이 북쪽으로 다시 진격하자,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곳은 남한강 상류의 농촌 마을로 예로부터 나무와 소금 등을 내륙으로 실어 나르던 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전쟁의 참화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라고 비껴가지 않았다. 삼천리 구석구석이 말 그대로 난리다.

 

113. 한 쌍의 원앙이 되어 / 1951. 2. 17.

중년의 남자가 부상당한 부인을 업고 피난가고 있다. 비인간적인 죽음과 파괴가 난무하는 전쟁 통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은 강한 생존의지와 고귀한 인간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다정하고 금실이 좋은 부부를 일러 '원앙 부부'라 한다. 이들이야 말로 한 쌍의 원앙이다.

 

114. 이 여인을 아시나요 / 1951. 2. 21.

유엔군 포로가 된 여자 공산당원이다. 김복희라는 21세의 이 여인은 공산당 선전요원으로 활동하다가 배고픔에 지쳐 병에 걸렸다. 그녀가 맡은 임무는 남한 주민에게 공산당을 선전하여 그들을 공산당원으로 교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녀는 유엔군에게 심문을 받으면서 뚱한 표정을 짓고 있다.

 

115. 하우스 보이 / 1951. 3. 4.

두 명의 그리스군이 그들의 마스코트인 한국 소년과 함께 볕이 좋은 곳에서 불을 쬐고 있다. 운이 좋은 전쟁고아는 마음씨 좋은 유엔군을 만나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잔심부름도 하였다. 이런 아이들을 ‘하우스 보이’라고 불렀다. 이들 중 일부는 전쟁이 끝난 후 미국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116. 소달구지와 유엔군 / Bert Ashworth. 1951. 3. 6.

미 해병 세 명이 소달구지를 타고 가고 있다. 달구지는 월거덕거리며 요란스럽게 길을 간다. 달구지가 어디로 가든 상관이 없다. 가는 곳까지 가다가 그냥 내리면 그만이다. 달구지꾼도 달구지에 누가 타든 말든 상관이 없다. 아무려나 달구지는 굴러 간다. 미군들은 달구지가 걷는 것 보다 훨씬 더 낫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을 것이다.

 

117. 영등포에서 / Walter Lea. 1951. 2. 12.

1・4후퇴 이후 다시 반격에 나선 유엔군이 영등포에 들어섰다. 거리의 시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환영하고 있다. 이제 서울을 코앞에 두고 있다.

 

118. 한강만 건너면 서울이다 / 1951. 2. 16.

미군병사가 노량진 부근에서 끊이진 철교너머로 용산 부근을 살펴보고 있다. 이제 한강만 건너면 서울이다.

 

119. 내 차례는 언제 오나 / 1951. 2. 21.

어린 소녀가 미 해군 상등병 데이비죤(Earl R. Davision)이 준 사탕을 고르고 있다. 옆의 아이들이 걱정스럽게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눈깔사탕’이 귀하던 시절, 미제 ‘캔디’야말로 아이들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사탕이었다. 그 시절의 아이들은 미군하면 ‘캔디’와 ‘초콜릿’을 떠올리곤 했다.

 

120. 유엔군 포로의 식사 / 1951. 3. 5.

전쟁 중 유엔군 포로들은 압록강변의 벽동 포로수용소 등에 분산 수용되었다. 이들은 철저한 감시 속에서 사상학습에 관한 토론과 회유 등에 시달려야만 했다. 사진은 유엔군 포로들의 식사 장면으로 인민군이 제공한 것이다. 포로들의 건강 상태와 표정이 매우 밝아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실제로 중공군에게 포로로 붙잡혀 벽동 포로수용소에서 28개월을 억류되었던 영국군 대위 파라 호커리는 그의 저서 『파란 아리랑』에서 그동안의 포로 행로는 인간의 인내심의 한계를 실험해 보는 드라마와 같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121. 다시 집으로 / Ed Hoffman 촬영. 1951. 3. 19.

1951년 2월 11일 서울 재수복 후, 곧 이은 중공군의 공세로 다시 서울을 떠나야만 했던 서울 시민들이 3월 18일 서울 재탈환 후 다시 서울로 돌아오고 있다. 지금까지 서울 시민은 세 차례의 피난 보따리를 꾸려야 했다. 지칠 대로 지친 그들의 얼굴이지만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122. 모래 위의 상처 / Ed Hoffman 촬영. 1951. 3. 22.

인민군 시체가 한강변 모래 속에 파묻혀 있다. 아마 1・4후퇴를 전후한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나 보다. 모래가 전쟁의 상처를 감추려고 하지만 선명하게 보이는 탱크자국은 이곳이 피로 물든 전쟁터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제 탱크 자국은 곧 지워지겠지만 사람들 가슴 속에 남아있는 전쟁의 상처는 영원히 지울 수 없을 것이다.

 

123. 빨래터의 탱크 / 1951. 3. 29.

유엔군 탱크가 북한강을 건너 후퇴하는 인민군의 후방을 공격하고 있다. 강가에서 한 여인이 빨래를 하고 있다. 바로 옆으로 탱크가 지나가도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나 보다. 그녀는 지난 3월 18일 유엔군이 서울을 재탈환하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124. ‘뻥이여!’ / Ed Hoffman 촬영. 1951.4.11.

자동차 엔진처럼 생긴 기묘한 장치의 ‘뻥튀기’는 전쟁의 시름을 잠시 잊게 해준다.  서울 재탈환 후 사회가 점차 안정을 되찾아 가면서, 서울 한복판에 ‘뻥튀기’도 다시 등장했다. 동네 아이들도 모여든다. 그리고 침울한 골목길에 모처럼 웃음소리가 들린다. ‘뻥이여!’

 

125. 빈대떡 파는 노파 / 1951. 4. 17.

서울 거리에서 노파가 빈대떡을 팔고 있다. 빈대떡은 녹두를 물에 불려 껍질을 벗긴 후 맷돌에 갈아 나물과 쇠고기, 돼지고기 따위를 넣고 번철에 부쳐 만든 음식이다. 북한 피난민 중에 많은 사람이 피난지에서 빈대떡을 만들어 팔기도 한다. 이를 ‘녹두지짐’이라고 부른다.

 

126-127. 제주도 고아원 1, 2 / 1951. 4. 22.


 

지난 겨울 서울에서 제주도로 보내져 온 전쟁고아들이다. 초롱초롱한 눈빛이 이곳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수용시설은 전쟁 중이라 보잘 것 없지만 그래도 이만한 것도 다행이다. 이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아이들이 거리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이들은 그래도 행복한 아이들이다.

 

128. 행복한 피난길 / 1951. 4. 23.

한 가족이 안전한 유엔군 방어선 뒤로 피난을 가고 있다. 가장은 부인을 지게에 앉혀 메고 식구를 이끌고 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는 끈끈한 가족의 정을 느끼게 한다. 이런 장면은 피난길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129. 깡통의 추억 / 1951. 5. 3.

강가에서 물놀이를 하던 세 아이들이 미군을 보자 깡통을 들이대고 있다. 미군이 버린 깡통은 전쟁고아들에게는 훌륭한 동냥 그릇이다. 아이들은 따뜻한 날씨 탓에 모처럼 말쑥하게 손발을 씻을 수 있었다.

 

130. 안양역의 피난열차 1 / 1951. 5. 3.

최근 인민군의 서울 진격으로 시민들은 다시 피난을 떠나야 했다. 안양역에서 한 가족이 기차 화물칸 사이의 빈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고 있다.

 

131. 안양역의 피난열차 2 / 1951. 5. 3.

세 번째로 남으로 피난 가는 피난민들은 전쟁의 역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고 있다. 이들은 마치 들놀이를 가는 사람들처럼 여유도 보인다. 피난 생활에 이골이 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체념을 했기 때문일까.

 

132. 할머니는 마실 가는 중 / Bert Ashworth 촬영. 1951. 5. 6.

머리와 등에 짐을 이고 지고, 서울 시민들이 세 번째로 남쪽으로의 피난길을 계속하고 있다. 오른 손엔 지팡이를 짚고 왼 손엔 주전자를 들고 마실 가는듯한 할머니의 모습에는 여유마저 보인다. 피난길이지만 할아버지 막걸리라도 받아드리려면 주전자는 필요할 것이다. 아니면 당신의 자리끼로 쓸 것인지도 모른다.

 

133. 야전의 유엔군 장성들 / 1951. 5. 26.

블랙 브라얀, 24사단장 호지, 제임스 반 프레트, 메츄 리지웨이 장군이 모습이다.

 

134. 아기 고무신 / Dave Cicero 촬영. 1951. 6. 7.

부산의 고무신 가게에서 젊은 엄마가 아기 신발을 고르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고무신은 해방 이후에 전성기를 이루기 시작했으나 전쟁 중에는 매우 귀한 존재였다. 처음의 고무신은 폐고무를 원료로 사용했기 때문에 대부분 ‘검정고무신’이 주종을 이루었다. 여기에 표백제를 첨가한 고급의 흰 고무신이 나왔다. 그러나 모든 물품이 귀하고 어려운 피난생활 중에 아기 고무신 하나 마련하기도 쉽지 않았을 게다.

 

135. 동굴 집의 두 자매 / Dave Cicero 촬영. 1951. 6. 7.

남쪽의 항구도시 부산은 안전과 정착을 위해 이주하는 수많은 피난민들에게 마지막 천국이다. 부산은 이제 피난민들의 도시다. 약 35만 명의 피난민들이 판잣집과 굴, 심지어는 땅 속에서 살고 있다. 사진은 두 자매가 동굴에서 생활하고 있는 모습이다.

 

136. 빈대떡과 피난살이 / 1951. 6. 12.

부산으로 피난 온 여인들이 좌판에서 음식을 만들어 팔고 있다. 음식이래야 빈대떡에 가락국수 정도지만 피난지에서의 한 끼 요기로는 충분하다. 음식장수 중에는 북한 피난민이 많은데 이들이 만든 음식은 남한 주민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137. 전쟁의 상처 / 1951. 6. 12.

전쟁 중에 부상당한 어린이들이 병원 앞에서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 한쪽 다리를 잃은 아이와 한쪽 팔을 잃은 아이, 이들은 아직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를 나이다. 또 자신들이 왜 전쟁의 피해자가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전쟁의 상처를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138. 총도, 대포도 없지만 / Dave Cicero 촬영. 1951. 6. 21. 

‘한 장의 사진이 수만의 단어보다 더 가치가 있다’라는 문구는 진부한 말이다. 그러나 이 비극적인 사진에서 이 어구의 의미는 생생하게 증명된다. 이 사진에는 총도 대포도 없다. 그러나 아이의 모습에서 전쟁의 무서움과 잔인함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139. 서까래를 올리고 / 1951. 6. 25.

6・25가 일어난 지 1년. 전쟁의 화마는 전국 방방곡곡을 할퀴었다. 진주는 남쪽 끝이라고는 하지만 이곳도 예외는 아닐텐데, 이 난리 통에 집을 짓는 일이 한창이다. 여러 명의 마을 젊은이가 지붕을 올리고 있다. 옆에서는 소로 밭을 일구는 모습이 여기는 평화시대다.

 

140. DDT와 아이들 / 1951. 7. 12.

피난민 소년의 머리에 DDT를 뿌려주는 국군. DDT는 이나 벼룩의 살충제로 6・25때 미군이 사용하였다. 이는 사람의 불결한 머리나 옷 등에 붙어살면서 피를 빨아 먹고 사는 해충이다. 이가 생기면 몸이 가렵고 긁으면 습진 등의 피부염을 일으킨다. 전쟁 중의 불결한 위생환경 속에서 이는 골칫거리였다. DDT는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살충제로 사용되다가 유해성이 지적되면서 결국 1970년대에 들어와서 대부분의 국가에서 DDT를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141. 농구는 즐거워 / 1951.8.20.

아이들이 미국 스포츠인 농구를 처음으로 하면서 이를 즐기고 있다. 이들은 전쟁고아로 현재 부산의 ‘해피 마운틴 고아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왼쪽의 여자아이는 농구보다 기자의 카메라에 더 흥미 있는 눈치다.

 

142. 아가야 우지마라 / 1951. 8. 31.

평화협정이 곧 재개되겠지만, 정전에 대한 희망은 사라지고 있다. 인민군을 피해서 북한지역의 주민들이 남으로 급히 피난 가느라 그만 아이를 놓고 갔다. 미군 하사관이 아이를 달래고 있다. 이렇게 부모와 생이별하고 영영 만나지 못한 경우가 한 둘이 아니다.

  

143. 미군과 소년 / 1951. 9. 14.

미군 의무관 레이널슨(Bernard R. Reinertson) 대령은, 전쟁 중 다리를 잃은 8세 소년 이성은에게 의족을 선물하면서 격려하고 있다. 그는 아이에게 새로운 의족으로 얼마나 회복할 수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아이는 고맙다는 인사를 미소로 대신하고 있다.

 

144. 전쟁터의 미사 / 1951. 10. 4.


산골짜기를 내려다보는 그늘진 산등성이가 유엔군 병사들이 미사를 올리는 유용한 야외 예배당이다. 적을 죽이고 또 그렇게 죽어가는 전우를 보면서 이들은 지금 무슨 기도를 하고 있을까.

 

145. 공산당이 싫어요 / 1951. 11. 5.

북한 공산당에 19일간 억류되었던 11세 소년 김원규가 판문점 자유구역의 유엔캠프에서 보호받고 있다. 얼마 만에 먹어보는 맛난 음식인가. 유엔군이 마련해준 식사 앞에서 목이 메어 넘어가지가 않는다. 이 소년은 초산에 있는 그의 부모 품으로 돌아갔다.

 

146. 헬리콥터와 아이들 / Dave Cicero 촬영. 1952. 9. 15.


미군 체리(Theodore Cherry) 병장이 헬리콥터 고장으로 착륙 했을 때, 헬리콥터의 작동에 호기심을 갖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였다. 두 아이가 조종간에 올라 앉아 환한 웃음을 짓고 있다. 전쟁 중이지만 아이들의 호기심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147. 중앙청 / D.V. 촬영. 1952.10.

중앙청은 옛 조선총독부 건물이다. 광복 후에는 주한미군사령부에 의해 군정청으로 사용되었고,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중앙행정관청으로서 기능을 하였다. 광화문 네거리에는 전차길이 남북으로 놓여있고, 군용 지프차와 트럭이 몇 대 보일 뿐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다.

 

148. 서울의 주택가 / D.V. 촬영. 1952. 10.

한옥 지붕의 고운 기와 선에서 평화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전쟁의 참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멀리 성당이 보인다.

 

149. 미8군 PX앞 로터리 / D.V. 촬영. 1952. 10.

서울 신세계백화점에서 종로 방향의 모습이다. 오른쪽은 중앙우체국 건물이다. 그 앞으로 군용 지프차와 달구지가 함께 보인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신세계백화점 건물은 전쟁 중 미8군 PX로 사용되었다.

 

150. 서울 남대문 / D.V. 촬영. 1952. 10.

남대문은 조선시대부터 서울 도성의 남쪽 정문이라서 통칭 ‘남대문’이라고 불렸다. 1398년에 완성된 이 건물은 그 후 몇 차례의 개축과 보수를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참화에도 무사했고 6・25의 포화도 비껴갔다. 전쟁 중에도 남대문은 그렇게 서울의 상징이었다.

 

151. 놀이하는 아이들 / D.V. 촬영. 1952. 10.

두 여자 아이가 나무 가지를 꺾어 놀이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한평생 나라 위해 몸 바쳐 오신, 고마우신 이대통령 우리 대통령……” 이런 노래를 부르는 것은 아닌지. 전쟁 중이지만 아이들은 마냥 즐겁기만 하다. 잠시나마 평화로운 서울의 뒷골목 풍경이다.

 

152. 부산역 풍경 1 / 1952. 10. 21.

전쟁의 추한 모습은 부산역에서 매일 밤 볼 수 있다. 500여명의 집 없는 아이들이 마룻바닥에 서로 뒤엉켜 잠을 자고 있다. 여기에는 더러 어른들도 섞여 있다.

 

153. 부산역 풍경 2 / 1952. 10. 21.

아무런 옷도 걸치지 않은 어린 아이는 부모 잃은 전쟁고아다. 앞에 놓인 깡통만이 그의 유일한 재산이다. 아이는 이것을 사용하여 음식을 구걸한다.

 

154. 서울 시내전경 / D.V. 촬영. 1953. 1. 1.

1953년 새해 첫날 남산에서 여의도 쪽을 바라본 풍경이다. 서울역에서 용산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보인다. 마포에서 절두산까지 거침없는 풍경이 시원하다. 평화로운 모습이다.

 

155. 사랑하는 이를 전쟁터로 / Ichiro Fujimura 촬영. 1953. 1. 17.

여자들이 전쟁터로 떠나는 장정들을 환송하고 있다. 아들도 있고 동생도 있다. 사랑하는 남편도 있다. 이제 가면 언제 다시 볼지 기약도 없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별이다. 그저 살아 돌아오기만을 기원할 뿐이다. 장정들은 ‘무운장구(武運長久)’라는 어깨띠를 두르고 있다.

 

156. 화폐개혁 / Ed Hoffman 촬영. 1953. 2. 27.

나이든 부부가 자신들의 환전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3년 2월 14일 정부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전쟁 중에 물가는 오르고 돈의 가치는 떨어지자,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고 경기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 내린 조치다. 이로서 기존 화폐의 유통은 정지되고 새로운 화폐가 유통되었다. 새로 나온 화폐는 ‘원’에서 ‘환’으로 바뀌었고 환전 비율은 100:1이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번 화폐개혁으로 누구도 손해를 보지 않을 것이라고 얘기하기 전까지 국민들의 불평이 쏟아졌다.

 

157. 아직은 어린 나이다 / 1953. 4. 4.

부모와 가족을 모두 잃은 아이가 폐허로 변한 자신의 집터에서 넋을 놓고 있다. 7~8세쯤 되어 보이는 이 아이는 전쟁의 참화와 자신의 처지를 이제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이가 지금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부모와 가족을 모두 잃고 고아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험난한 세상을 혼자서 헤쳐 나가기에는 아직은 어린 나이다.

 

158. 거제포로수용소 1 / 1952. 5. 15.

수용소 안에서 구호와 노래를 부르며 난동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다. 수용소 철조망에는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159-160. 거제포로수용소 2, 3 / 1952. 5. 19.


 

난동 사건 후, 그들을 취재하러 온 공산당 측 특파원을 환영하는 플랜카드를 걸어놓은 모습이다. 플랜카드에는 ‘쌍방의 협의에 의해, 우리는 공산군 포로들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적혀있다.

 

161. 거제포로수용소 4 / 1952. 5. 22.

폭동이 진압된 후 망루에서 본 수용소의 모습이다. 두 명의 감시병이 수용소 밖에서 포로들의 회담을 지켜보고 있다. 철조망 울타리를 따라서 항의 플랜카드가 어지럽게 걸려있다.

 

162. 거제포로수용소 5 / 1952. 5. 28.

폭동이 진압된 며칠 후의 수용소의 모습이다.

 

163. 거제포로수용소 6 / Dave Cicero 촬영. 1952. 5. 30.

수용소의 보트너 장군이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거제포로수용소에 새로 도착한 영군 군인들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최근 두 명의 포로가 죽었고 네 명은 부상당했다. 폭동은 포로들이 감시병을 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또 며칠 전에는 66포로수용소에서 8명이 죽었고 17명이 부상당했다. 영국 군인들은 66수용소의 질서를 회복하도록 투입되었다.

 

164. 거제포로수용소 7 / Dave Cicero 촬영. 1952. 6. 16.

수용소에서의 폭동 이후, 85포로수용소의 포로들이 소년 소녀 댄스 공연하고 있다. 이 공연은 3,400명의 인민군 장교들을 위한 것으로, 이들은 지난 금요일(6월 13일?) 66수용소에서 이동해 왔다. 장교들은 그들의 새로운 막사로 이동하면서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으나 행진 중에 군가와 반미의 노래를 불렀다.

 

165-166. 이학구는 누구인가 1, 2 / Dave Cicero 촬영. 1952.5.29.


 

1951년 5월 7일, 거제도포로수용소 76수용소에서 난동이 일어났다. 포로들이 수용소장 도드 준장을 감금하고 맨 처음 요구한 것은 이학구 총좌를 불러달라는 것이었다. 총좌는 우리 군의 대령에 해당한다. 이학구는 공산군의 포로 중에서 최고위 계급이다. 장교들만 수용하는 66 수용소에 있던 이학구는 76 수용소로 옮겨졌다. 그는 인민군 2사단의 참모장으로서 6・25가 터지고 38선에서 개시된 인민군의 최초 공격을 지휘했다. 그런 그가 1950년 9월 21일 낙동강 전선에서 사단장 홍용진 소장을 권총으로 쏜 후 미 제1기병사단에 투항했다. 그리고 그는 귀순자가 아닌 포로로 분류되어 66수용소에 수용되어 있었다. 이런 이학구의 약점을 볼모로 포로들은 그를 자신들의 대변자로 내세웠다.

위 사진은 수용소장 보트너(Haydon L. Boatner) 장군 사무실에서 걸어 나오는 이학구의 모습이다. 아래 사진은 이학구(사진 왼쪽)의 통역관이 수용소 밖의 미군 장교에게 불평을 늘어놓고 있다. 오늘 3천 명의 포로들이 격렬한 데모를 벌였고, 이 데모는 100여 명의 군인이 최루탄을 쏘고서야 진압되었다.

 

167. 중공군 비무장지대 침입 / Dave Cicero 촬영. 1951. 8. 6.

중공군은 유엔과 맺은 협정을 어기고 개성의 정전회담장소 근처를 무장 행진하고 있다. 이 사건을 미 극동군 총사령관 겸 유엔군 총사령관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대장이 항의하자 중공군은 사과를 하였다.

 

168. 판문점 정전회담 장소 / 1951. 10. 26.

문산과 개성 사이의 판문점에서는 본격적이면서 전면적인 정전회담이 진행 중이다. 메인 회담 장소는 사진에서 중간부분의 도로 오른편에 위치한 텐트다. 그 오른 편 아래에 헬기가 보인다. 지금까지의 정전회담 장소는 개성 ‘평화의 집’이었으나 유엔군 측의 요구에 따라 오늘부터 판문점으로 옮겼다.

 

169. 판문점의 유엔군과 중공군 경비병 / 1951. 10. 29.

판문점 정전회담이 열리는 동안 유엔군과 공산군의 경비병 모습이다. 중공군 경비병이 ‘경비’라고 쓴 한글 완장을 차고 있다. 유엔군 병사가 중공군의 옷차림에 호기심을 갖고 쳐다보고 있다.

 

170. 판문점 정전회담 / 1951. 11. 3.

3군단장 이형근 중장(?)이 한국군 대표로 참석했다.

 

171. 판문점의 중공군 경비병 / 1951. 11. 19.

솜이 든 겨울 군복을 입고 총검으로 무장한 두 명의 중공군이 판문점 정전회담장소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서 있다. 아래의 큰 텐트는 유엔군과 중공군이 회담을 하는 장소다. 유엔군과 중공군 사이에 판문점 중립 지역 안에서 양측의 순찰병들이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

 

172-173. 개성 ‘평화의 집’ 정전회담 1, 2 / Dave Cicero 촬영. 1951.7.10.


 

계속되는 전쟁에 부담을 느낀 유엔군과 공산군은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첫 정전회담을 열었다. 북한 측은 정치적, 심리적 효과를 노려 공산 측 점령지역 이었던 개성을 제안했으며 다급했던 유엔 측은 이에 응했다. 위의 사진은 정전회담이 열리고 있는 개성의 ‘평화의 집’ 전경이다. 이곳은 고급 요정이었던 내봉장 건물이다. 취재기자와 사절단으로 임명된 사람들이 보인다. 아래 사진은 취재기자와 유엔관계자들이 회담 장소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협상 대표들이 탑승한 헬리콥터가 근처에 착륙을 준비하면서 ‘평화의 집’ 주위를 맴돌고 있다.

 

174. ‘38선 정전 결사반대’ 시위 / 1951. 7. 14.

정전회담 소식이 알려지자 대부분의 국민들은 반대 입장을 보였다. 사진은 부산 서쪽에 위치한 항구도시 진해의 대한청년단 대원들이 ‘38선 정전 반대’ 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들은 영어와 한글로 쓴 플랜카드를 들고 도시를 가로질러 행진하고 있다. 이러한 시위는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이에 앞서 1951년 5월 26일, 정부는 ‘통일 없는 정전협정 반대 성명’을 내고, 6월 9일 이승만 대통령은 ‘38선 정전 필사선언’을 천명하고, 정부는 이튿날 부산에서 ‘정전반대 궐기대회’를 갖기도 했다.

 

175. 헨리 호디 장군 / 1951. 12. 5.

판문점 정전회담을 마친 헨리 호디 장군의 모습이다.

 

176. 제주도포로수용소 / 1953. 4. 8.

제주도 포로수용소에서 포로 입소절차를 밟고있다. 

 

177. ‘내몰자 오랑캐 압록강 너머로’ / 1953. 5. 2.

1951년 7월부터 시작된 정전회담은 2년 가까이 끌어오면서도 전쟁은 계속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를 원치 않았다. 이러한 국민의 뜻을 반영하듯 1953년 4월 11일 이승만 대통령은 ‘종전반대 단독북진 성명’을 발표하였다. 판문점에서 정전회담이 진행되고 있지만 통일이 보장되지 않는 평화조약에 반대하는 포스터들이 서울 곳곳에 붙었다. ‘내몰자 오랑캐 압록강 너머로’라고 달리는 전차에 현수막을 걸어놓았다. 

 

178. ‘우리에게 통일을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 / 1953. 5. 2.

‘우리에게 통일을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는 영문 포스터가 벽에 붙어있다. 아이들이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다.

 

179~180. 북한포로의 송환 1, 2 / Dave Cicero 촬영. 1953. 5. 3.


 

1953년 4월 20일부터 5월 3일 사이에 판문점에서는 부상포로 교환이 이루어졌다. 5월 3일 유엔군은 185명의 인민군 포로를 포함하여 모두 6,620명의 포로를 북으로 보내고 683명의 유엔군 포로가 남으로 귀환했다. 사진은 북한으로 송환되는 인민군 포로들이 유엔군 측에서 제공한 옷을 벗어버리고 있다.

 

181. 정전협정 반대 / 1953. 6. 14.

서울의 한 집회에서 정전협정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182. 한국전에 참전한 아이젠하워 대통령 아들 / 1953. 7. 17.

 

아이젠하워 대통령 아들과  중공군 총사령관 팽덕회의 아들이 유엔군과 중공군으로 한국전에 참전하였다. 팽덕회의 아들은 한국전에서 전사하여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하려 하였으나 팽덕회는 극구 반대하여 한국 땅에 묻혔다. 이들이 보여준 지도자 정신은 우리에게 시사하는바가 크다.

 

183. 정전협정 환영대회(?) / 1953. 7. 28.

서울 파고다 공원 부근에서 휴전협정 환영대회가 열렸다. 유엔기가 걸려있다.

 

184. 판문점의 유엔군 대표 / Dave Cicero촬영. 1953. 7. 28.

 

 

185. 돌아가는 북한군 여전사 / 1953. 8. 10.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는 북한여군들.

 

186. 남이냐 북이냐 / Dave Cicero 촬영. 1953. 10. 22.

1953년 8월 5일부터 9월 6일 사이에 유엔 측과 북한 측은 ‘종전협정에 의한 송환 희망포로 교환’이 시작되었다. 유엔군은 9월 10일부터 23일 사이에 송환을 원치 않는 반공포로 22,604명을 인도군에 인도하였다. 사진은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한 5명의 인민군 포로의 모습이다. 카메라를 마주보고 앉아 있는 이들은 포로교환 심사 중에 북한으로 송환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이들은 포로수용소를 나왔을 때, 그리고 인도방위군으로 가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다시 북한으로 가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이 5명의 포로는 공산당원에게 설득을 당하고 있다. 뒤에는 베레모를 쓴 인도방위군이 서 있다.

 

187. 어느 반공포로의 환희 / Dave Cicero 촬영. 1954. 1. 23.

인민군 포로 중에는 인민군에 강제로 징집된 북한 주민도 상당수 있었다. 이들은 결국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남한을 선택하였다. 1954년 1월 12일, 유엔군은 송환된 2만 천여 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사진은 서울에 도착한 어느 반공포로가 태극기를 흔들며 기쁨에 넘쳐 감격해하고 있다.

 

188. 공산주의를 택한 미군포로들 / Dave Cicero 촬영. 1954. 1. 29.

 

미군 포로 중에는 남한으로의 귀환을 원치 않는 포로도 있었다. 사진 속 21명의 미군은 공산주의를 위해 본국으로 송환되는 것을 거부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판문점 완충지대의 포로수용소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왼쪽에서부터 인공기를 들고 있는 상등병 벨호메(Albert D. Belhomme), 상등병 스키너(Lowell D. Skinner), 아담스(Clarence C. Adams), 테네슨(Richard R. Tenneson), 베너리스(James G. Veneris) 등이다. 이들은 모두 불명예스럽게 미군의 복귀를 거부하였다.

 

189. 모택동의 심판 / 1954. 1. 23.

인천의 중공군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있는 포로 중 자유세계로의 귀환을 희망하는 포로들이 모택동의 인형을 만들어 놓고 희롱하고 있다.

 

190. 제3국으로 가는 중공군 포로들 / 1954. 8. 21.

중공군 포로 중 제3국행을 희망한 “중화민국 반공용사”들이다.

 

191. 누구의 잘못인가 / Ichiro Fujimura 촬영. 1953. 2. 25.

한국전쟁은 남북한 이외에도 21개국의 유엔군과 중공군이 참전한 다국적 전쟁이었다. 전쟁은 애초부터 비극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 한국 전쟁 중 태어난 ‘전쟁 사생아’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다. ‘혼혈아’인 이들은 전쟁 중 대부분 한국여성과 미국인 혹은 다른 유엔군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다. 이들 중 일부는 고아원이나 다른 기관에서 돌보고 있고, 대부분은 그들의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사진의 세 아이는 서울의 ‘충현고아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들의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참담하고 어둡다.

 

192. 남은 사람들의 슬픔 / 1953. 10. 20.

이제 전쟁은 끝났다. 살아서 돌아온 사람들은 가족들과 기쁨의 재회를 하지만 주검조차도 찾지 못한 대부분의 전사자 유족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에 싸여있다. 정부에서는 전쟁 중 목숨을 잃은 군인들을 위한 추도회를 열었다. 사진은 추도회장에서 자식과 남편을 잃은 여인들이 목 놓아 울고 있는 모습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연설을 할 때 많은 군중들이 연단 앞으로 몰려가기도 했다.

 

193. 전쟁은 끝났지만 / 1953.

한국 전쟁에서 부상당한 미군들이다. 한국전쟁에는 세계 21개국에서 572만 명의 유엔군이 참전하여 무려 15만 명의 희생자를 냈다. 이들은 낯선 한국 땅에서 한국의 자유를 위해 고귀한 젊음을 바쳤다. 사진은 전쟁에서 부상당한 병사의 모습이다. 두 다리를 잃은 두 병사와 한쪽 다리와 팔을 잃은 병사, 누가 더하고 덜하고도 없는 처지다. 이들은 팔 다리를 잃은 대가로 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평생을 참담한 절망 속에서 보내야 할 것이다. 왼쪽 병사의 눈빛에 우리는 무어라고 답해야 하는가?

 

194. 한국을 떠나는 유엔군 병사들 / 1954. 1.(?)

전쟁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인천항에서 배를 타려고 하는 병사들. 올 때와는 달리 모두들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다.

 

195~196. 돌아온 한강 1, 2 / 1954. 1.


 

전쟁이 끝나고 그 해 겨울, 전쟁의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야 하지만 사람들은 다시 얼어붙은 한강을 찾았다. 얼음낚시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잡아 장에 내다팔 요량이다. 한강의 잉어는 산후 조리에 매우 인기가 있었다.

 

197. 남겨진 아이들 / 1954.

전쟁 후 남한 사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아이들의 사회복귀다. 수천 명의 아이들이 고아원에서 보호를 받고 있지만 이보다 훨씬 많은 수의 아이들이 아무런 보살핌도 없이 거리를 방황하고 있다. 이들은 미군에게 구걸을 하며 미군 시설 내의 쓰레기통을 뒤지기도 한다. 혹독한 겨울에 살아남기 위해 여기저기서 헝겊을 모아 만든 정체를 알 수 없는 옷을 입고 있다.

 

198. 봉두난발 / 1954.

전쟁으로 고아가 된 두 소년은 이발에는 관심을 가질 수도 없는 처지다. 추위와 허기를 달래려고 거리를 헤매고 있다.

 

199. 숨바꼭질 하는게 아니랍니다 / 1954.

어린 소년이 먹을 것을 찾으러 들어간 쓰레기통에서 기어 나오면서 카메라를 보고 놀라고 있다.

 

200. 전쟁은 깡통이다 / Yun 촬영. 1954. 3. 23.

깡통을 앞에 놓고 쪼그리고 앉아 있는 아이. 누군가 여기에 돈을 넣어줄 것을 기대하고 있지만 아이의 표정에서는 이마저 초연해 보인다. 슬픈 우리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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